정승오 감독, “제사 지낼 때 누군가는 차별, 이상했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는 영화 ‘이장’이 개봉한다.  

20일 오후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영화 '이장'(감독 정승오)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정승오 감독과 배우 장리우, 이선희, 공민정, 윤금선아, 곽민규, 송희준이 참석했다.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흩어 지낸 오남매가 오랜만에 모이며 발생하는 이야기로, 가족 내 성차별과 억압을 무겁지 않게 담아냈다. 우리 사회 전통이라는 제사, 그 속에 담긴 가부장제의 모순과 한국사회의 민낯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정승오 감독은 "저희 집도 어렸을 때 제사를 지냈었는데 제사라는 것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의미있는 세레모니인데,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가족 내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뭔가를 할 수 있고 없고가 결정된다는 게 이상했고,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가에서 시작한 영화다"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장 과정에서 끊임없이 차별 속에 놓여졌던 네 자매의 이야기를 현실감 넘치게 담아냈다. 정작 장남 없이는 묘 이장도 못하는 네 자매가 연락두절인 장남을 찾아나서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떻게 장남도 없이 무덤을 파냐”며 “장남을 데리고 오라”고 호통치며 네 자매를 내쫓는 큰 아버지 ‘관택’(유순용)의 불호령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를 상징한다.

정승오 감독은 남성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차별의 강요 속에 성장한 네 자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에 대해 정승오 감독은 "제가 밀착해서 볼 수 있는 가족이 있었는데, 아내의 가족이 오남매다. 실제 상황이 그런 부분도 있고 안 그런 부분들도 있는데, 그들의 상황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오남매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저희 바람들이 많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장남인 막내 동생을 찾아 나선 네 자매의 로드무비이기도 한 ‘이장’은 네 자매의 각각의 스토리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도 여실히 보여준다. 육아휴직 신청과 동시에 퇴사를 권고 받은 싱글맘 첫째 ‘혜영(장리우), 가정주부지만 남편의 배신에 믿을 건 ‘돈’밖에 없게 된 둘째 ‘금욕’(이선희), 경제적으로 어려워 결혼이 쉽지 않은 예비신부 셋째 ‘금희’(공민정), 남성 중심의 사회에 강하게 반기를 들며 큰 아빠에게도 거침없이 반항하는 넷째 ‘혜연’(윤금선아)까지 우리 옆에 있을 법한 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배우들이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네 자매의 연기 호흡 또한 관전 포인트다.

첫째 ‘혜영’을 연기한 장리우는 "실제로도 첫째고 막내 동생이 있다. 우리 아버지도 가부장적인 면이 있어,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가 생각나는 지점들이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고, 둘째 ‘금옥’을 연기한 이선희는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 2시간 만에 다 읽고, 바로 하겠다고 전화 드렸을 정도로 공감이 되는 상황이 많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셋째 ‘혜연’ 역의 윤금선아도 “실제로 남동생이 있는데 명절에 할머니가 새뱃돈도 더 많이 주셨다, 그런 지점에서 ‘혜연’의 마음을 공감했다”고 현실에 기초한 연기를 펼친 소회를 밝혔다. .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여성 서사가 짙은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게 된 셋째 ‘금희’ 역의 공민정은 “"82년생 김지영’이나 ‘이장’같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목소리를 많이 낼 수 있는 영화에 동참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 15회 인천여성영화제, 제 20회 제주여성영화제, 제 10회 광주여성영화제, 제2회 정선여성영화제 등 국내 대표 여성 영화제에서 ‘이장’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 바로 여성 서사에 있다.

이에 대해 정승오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쓰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제가 느꼈을 때 가정 내에서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는 가부장제라는 것이 가정 내 성 역할을 고정 짓고 거기에서 차별이 나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 그것이 되게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라고 생각을 한다. 가족 내에서의 차별이, 비단 여성 서사, 여성에 대한 차별에 포커스가 된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 발현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제사 준비는 다 하고, 여성이란 이유로 절을 하지 않는 우리의 엄마, 누나, 여동생 모습은 남자 감독에게나 남자 배우의 눈에도 이상했다는 것이다. 정 감독에 이어 막내 동생이자 장남인 ‘승락’ 역을 맡은 곽민규도 "명절 때 여성 가족 분들은 절을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남동생만 있지만, 연기 해보려고 생각을 해보니까 누나들 마음에 공감이 많이 갔던 것 같다. 저라도 얄밉고, 말 없고 자기 멋대로 하는 남동생에 대해 화가 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극중 말 없던 막내 ‘승락’이 누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에 대해 곽민규는 “달라지고 싶은 시사점이 있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했다”고 전했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한다’는 단호한 카피로 이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드러낸 영화 ‘이장’,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임에도 국외의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올해의 아시아 영화’로 떠올랐다. 

영화 ‘이장’은 개봉에 앞서 제35회 바르샤바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경쟁부문 대상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가 수여하는 넷팩상(NETPAC)을 수상했다. 바르샤바국제영화제는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더불어 국제영화제작가협회(FIAPF)가 인정한 A급 영화제로, 이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이 경쟁부분에서 상을 받은 건 한국 작품으로서는 최초다.

이외에 '이장'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아트하우스상 수상 후, 파리한국영화제의 신인 감독을 집중 조명하는 포트레(Portrait) 부문, 대만금마장영화제, 뉴욕아시안영화제, 피렌체한국영화제, 벵갈루루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 초청을 받았다. 북미 최대의 아시아 영화 전문 매체인 AMP(Asian Movie Pulse)가 선정한 ‘올해의 아시아 영화 TOP 25’에도 선정됐다.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 '순환소수'(2017)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족상을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작업을 해온 정승오 감독은 ‘이장’이 해외 유수 영화제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언어랑 문화가 다른 국가에서 상영이 되면서 공감을 많이 해주셔서 신기하기도 했고 안타까운 면도 있었는데, 가부장제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퍼져 있는 남성 중심적인 그걸로 인해서 누군가는 차별을 받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많이 해주신 것 같아서 그 부분이 다른 관객분들에게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현대 가족상을 향한 지적인 비판의식과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동시에 지닌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 ‘이장’은 오는 3월 5일 개봉한다.

안지선 기자 ajs405@hanmail.net [사진제공= 영화 ‘이장’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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